박찬우-공사장 가림막이 있는 풍경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도시는 여전히 생성중이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도시공간이란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도시는 늘상 변화한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낡은 건물이 지워지는가 하면 리모델링이 반복된다. 도시는 흡사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증식하고 퍼져나가면서 매번 새롭게 환생한다. 사라지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특히나 한국의 대도시들이 보여주는 그 급속한 변화의 양태는 무서운 속도 속에서 진행된다. 과거와 기억은 부재하고 오로지 새로운 현재만이 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그 공간을 거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과의 친연적인 관계를 망실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일시적으로 접속될 뿐이다.


벤야민은 도시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시각적 지배(the dominance of the visual)와 잔해(fragment)에 대한 편애 그리고 즉흥성과 충격에 대한 관계성을 거론했다. 도시는 과거의 잔해를 뒤로 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동시에 그것은 거대한 스펙터클의 위용을 갖추며 욕망의 기제가 된다. 한편 도시의 생명은 움직임이다. 도시는 “비정착성, 불안정함, 순간성, 우연성”을 특징으로 한다. 익명의 낯선 도시인들은 도시라는 인공적인 환경에서 제도들에 의탁하여, 끊임없이 변경되는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박찬우는 지난 2008년부터 신도시 주변을 촬영해오고 있다. 그는 공사장 가림막과 그 밑을 거니는 이들을 사진에 담았다. 원경으로 잡은 구도로 인해 우리는 이 풍경을 구경꾼처럼 바라본다. 꽤나 먼 거리에서 조망한 풍경이다. 사진의 하단은 도로와 밀착시켰고 좌우폭은 공사장 가림막으로 꽉 채운 구도다. 특정 장소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공사장 가림막 또한 어떠한 문구나 이미지 없이 단색으로 칠해진 평면이다. 그러니 이곳이 어디인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저 단호하고 무표정하며 커다란 벽, 가림막은 공사 중인 장소를 외부로부터 차단하고 은폐하는 동시에 머지않은 시간에 새롭게 환생할 건물, 공간을 기대하게 해준다. 신도시란 이름부터가 구시가지, 기존의 공간과는 대비되는 차원에서 첨단의 시설과 쾌적하고 편리하며 아름다운 공간으로 자리 잡을 것임을 구원처럼 약속해준다. 지상에 세워질 저 유토피아는 분명 그에 걸맞은 야릇한 이름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풍경은 그저 광활하고 적막한 기운만이 감돈다. 광원이 부재한 이 사진 또한 납작하고 공허해 보인다. 흡사 인공의 세트장이나 미니어처를 보는 듯 하다. 또한 작가는 불필요하다고 여긴 것들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편집과정을 통해 재현적인 사진과는 다른 차원에서 현실을 반영한다. 그는 실제로부터 출발하지만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연출했다.


보는 이들은 한창 개발 중이고 건설 중인 장소라는 사실만 상상할 뿐이다. 저 멀리 거대한 가림막이 수평으로 펼쳐져있고 그 너머로 거대한 수직의 빌딩들이 직립해있다. 더러 나무들이 가림막을 분할하며 서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주 작은 사람들이 그 가림막 밑을 느리게 걸어 다니고 있다. 그들은 도시의 부속물처럼, 혹은 인공의 모형물처럼 보인다. 구제체적인 인간존재가 아니라 마치 가림막에 그려진 그림과도 같다. 커다란 빌딩/아파트 건물과 높은 가림막과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위치한 사람들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 상대적인 물리적 크기는 동시에 대비되는 심리적인 상황성을 야기한다. 거대한 가림막과 빌딩 사이에 매우 작게 위치한 사람들은 흡사 저 도시, 건물로부터 추방당하거나 배제된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저 벽 안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도 없을뿐더러 관심도 없이 다만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다. 이들과 무관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저 공간, 건물은 과연 무엇일까? 이 도시의 개발과 재편이란 이곳을 사는 이들과 어떤 연관성 아래 작동되는 것일까?


도시공간은 시대적 연원을 달리하는 여러 지층들이 뒤틀리고 뒤섞여 만들어낸 혼합체이다. 도시는 사회, 문화적 조건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하여 성립된다. 또한 도시는 그 내부와 주변으로 파생되는 역사적인 사실이 물리적으로 등록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회. 정치. 경제. 테크놀로지 등을 포함하는 환경적 인자들이 도시의 지형 위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도시계획이나 디자인의 주요관점은 언제나 낙원, 유토피아, 이상향을 추구하는 쪽으로 초점이 맺혀져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도시는 사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도시는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출현과 사라짐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불안정한 상태로서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도시는 자본과 권력의 지형 아래 배치되어 있다. 그 도시공간은 그곳을 소유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허용된다. 그로부터 밀려난 이들은 저 펜스 바깥에서 서성거린다. 작가는 그들을 채집했다. 아마도 작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초상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진은 작가가 건너편 거리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응시한 결과다. 결국 그가 본 것은 새로운 욕망의 필요에 의해 추동된 신도시의 공사현장과 그 주변을 거니는 이들이 빚어내는 상반된 풍경이자 신속한 변화 속에서 덧없이 사라지는 건물, 사람들이다. 이 순간적인 모습은 사진촬영이 끝나는 순간 죄다 사라진다. 이곳을 거닐던 사람들의 자취는 물론이고 펜스 너머의 빌딩들도 머지않아 이내 모습을 바꿀 것이다. 사진은 저 변화의 속도에 무력하게 따라갈 뿐이고 그 결과 남겨진 것은 사후의 흔적, 잔해들이다. 작가가 주시한 이 공간은 이전에 없던 곳이고 멀지않은 시간에 다시 그 모습을 바꾸거나 혹은 사라질 곳이다. 다만 영원히 변하지 않을 자연, 하늘만이 행인들 위로 무심하게 펼쳐져 있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숨이 가뿐 현상, 부산한 욕망을 내려다본다. 수직으로 발기된 건물들과 그 밑을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짓는 공허한 장면이 하늘 아래 고요히 펼쳐져 있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고 순간과 영원이 협잡하는 그런 풍경이다.


“Wall은 현재의 기록이다. Wall(벽)은 공사장 가림막이다. 그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 간다.나와 같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채집하듯 촬영해서 한 화면에 담는다. 그 들이 곧 나 이고 내가 곧 그들이다. 건너편에서 내가 나를 본다. 벽 너머 그들의 새로운 도시가, 새로운 꿈이 지어지고 있다. 벽 너머의 세상을 위해 그들은 오늘도 또 간다. 그 위로 하늘이 더 큰 넓이로, 더 큰 깊이로 펼쳐져 있다. 하늘은 쉼이고 여백이고 영원이다.”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