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물 그리고 사진


글 : 최연하(사진평론, 독립큐레이터)


사진 매체의 자율성을 견지하며 존재론적인 사진미학을 고수한 박찬우 작가의 결정체, <Stone> 연작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돌의 실체와 그 너머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더듬게 한다. 사진의 언어는 무위(無爲)적으로 존재하기에, 오직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서의 사진 세계가 박찬우 작가의 <Stone>에서 펼쳐진다. 


돌이 박힌 사진을 본다. 자연이 만든 단단하고 당당한 기념비, 돌이 박찬우 작가의 사진에 박혔다. 강물과 함께 흐르고 흔들리다 사진 속으로 정박한 돌은 여전히 물과 함께 있다. 물과 돌이 같이 있으니 ‘수석(水石)’이다. 사진 속 여백은 애초에 돌이 이고 있었을 하늘처럼 드높고, 돌 아래 물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돌의 형체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흔들리는 물과 멈춘 돌. 강물따라 유영하며 돌과 물이 만든 돌무늬, 돌색은 제각각 특이하다. 돌의 견고함과 변화무쌍한 물이 부딪히며 다종다양한 무늬와 색을 띠고, 돌의 표면, 톤(tone), 물에 닿은 선분은 돌-삶의 이력을 보여준다. 돌은 물과 함께 할 때 형태와 색깔, 질감이 분명해진다. 어떤 돌은 밝고 맑게 두둥 떠 있고, 또 어떤 돌은 캄캄히 침잠해있다. 두루뭉술하게 중도에 머문 돌도 있다. 하늘의 달처럼 떠오르는가 하면 지상으로 사뿐히 내려와 가부좌를 튼 수도승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속에 잠긴 돌을 찍은 사진. 돌과 물과 사진은 서로 접속하고 침투하며 서로를 연결한다. 돌과 물은 박찬우 작가의 사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인 세계-화석이 되었다. 돌과 사진은 비슷한 운명이다. 돌은 결코 자신의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한곳에 굳건하게 변함없는 자세로 머문다. 사진도 겉만 보여줄 뿐 안은 보여주지 않는다. 천태만상의 사람과 사물, 파란만장한 사건 ‧ 사고 … 모두 사진이 되면 고정하고 침묵한다. 돌을 감싸는 환경 – 나무와 땅과 마을과 강과 산 등 – 에 따라 돌의 모습이 달리 보이듯, 한 장의 사진은 놓인 맥락에 따라 의미와 서사가 달라진다. 돌이 자연의 기념비라면 사진은 문화의 기념비이다. 사진에 찍힌 사람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 영구적으로 사진 속에서 살아가듯, 돌은 변치 않는 부동성과 견고함으로 자연의 모뉴먼트가 된다. 엘리아데의 원형 상상력에 따르면, 돌은 사자(死者)의 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한다. 사진은 부재(不在)의 증명이다. 사진에 찍힌 사람은 모두, 언젠가 필멸한다. 오직 사진 속에서 삶을 이어갈 뿐이다. 엘리아데는, 돌은 그것이 지닌 부동성, 경직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을 깨뜨리고자 하는 힘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원래 돌의 라틴어인 “toki”는 “힘, 위험”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사진도 폐쇄적이고 단편적이어서 프레임 바깥의 세계를 겨냥하며 자신이 분명히 (살아) 있었던 것의 흔적임을 주장한다. 돌과 사진, 둘 다 고정 불변하는 기념비(monument)인 것이다. 


언제부턴가 박찬우 작가는 강가의 수많은 ‘돌’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돌을 찾아 방방곡곡으로 길을 떠난다. ‘그 돌’이 나타날 때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순례를 했다. 그런데 왜 돌일까? “돌은 불변성과 절대성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친다.” 단단한 부동성 덕분에 인간의 속세와는 다른 불멸과 불변을 상징하는 돌.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메신저로, 신성하고 신화적인 시공에 돌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돌을 담기에 사진은 매우 적합한 매체다. 돌의 질감과 촉감과 색감은 사진에 의해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역학에서 ‘돌(金)’은 ‘물(水)’의 생기를 돋우고 조화로움을 형성한다. 돌은 ‘관성’을 물은 ‘인성’을 관장한다. 둘이 만나면 기운이 생동하고 상생하는 것이다. 박찬우 작가와 돌의 조우도, 돌과 물의 만남처럼, 서로 ‘감응’하는 특별한 경험의 시간을 공유한다. 어느 순간 서로를 알아보고 사진으로 관계를 구성해 또 다른 세계(작품)로 나아가는 힘의 운동이다. 어쩌면 작가는 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돌의 세계 – 단단하고 견고하고 영원한 – 를 사진으로 끌어와 온전하고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을 함께 심으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박찬우 작가의 돌은 바깥에 놓인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사진보다 먼저 존재하면서 사진을 주도한다. 재현의 대상이 아니기에 사진가/대상이라는 대립쌍을 무효화하며 피사체의 지위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돌이다. 단단하고 당당하고 견고하게 자신을 세움과 동시에 물과 함께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하는 돌의 순환. 


지구상에 무수한 돌이 있는데 박찬우의 돌은 왜 기념비인가? “도대체 사진이란 그 ‘자체로서’ 무엇인가.” 바르트(Roland Barthes)에게 사진은, 지시 대상(피사체)이 없이도 장르 자체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다른 예술들(회화, 조각, 문학, 음악 등)과 달리 지시 대상이 없으면 그 스스로도 존재 근거가 희박한 예술 장르이다. 즉, 사진은 한때 분명히 (살아) 있었던 것에 닿은 ‘빛의 흔적’인 것이다. “사진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불가피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리고 분명히 존재했던 것을 말한다. 이 미묘함은 결정적이다. … 즉 사진의 본질은 사진이 재현한 것을 승인해 주는 데에 있다.” 사진 예술에만 고유한, 그 자체로 사진을 자율적인 예술이게 해주는 특성이 바로 인덱스성이고, 바르트 사진사유의 뇌관이다. 박찬우 작가가 ‘그 돌’을 찾아 촬영한 이유이다. 오로지 박찬우 작가 외에는 알 수 없는, ‘그 돌’이 중요하다. 말 없는 돌의 웅성거리는 사연을 본다. 그리고 사진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사진이 진리를 보게 만드는 힘에 주목한다. 물의 입자와 빛의 파동이 만나 박찬우 작가의 사진 속에서 돌은 흐르며 빛나고 있었다. ‘그 돌’과 물이 한 몸으로 일렁이며 사진 속에서 고요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마르치아 엘리아데, 이은봉 역, 『종교 형태론』, 형설출판사, 1982, p.241.

마리치아 엘리아데, 이동하 역, 『聖과 俗』, 학민사, 1997, p.139.

롤랑 바르트, 조광희 역,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86, p.11.

롤랑 바르트, 위의 책,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