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우-물에 잠긴 돌(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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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타원형의 돌이 물에 담겨있다. 한국 산하의 부드러운 능선이나 바다거북이의 등을 닮은, 수평으로 둥글게 내려앉은 돌은 희박한 색채와 조심스러운 표면의 질감을 유지한 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흡사 돌이 반신욕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돌의 중간부분으로 차들어 온 물에 의해 생긴 선이 돌을 양분하고 있고 그로인해 수면 위와 수면 아래에 잠긴 돌은 색채와 질감에서 조금은 다른 얼굴, 몸을 보여준다. 돌을 채운 물에 의해 만들어진 묘한 풍경이다. 흰색의 낮은 높이를 지닌 사각형의 틀과 물, 돌이 만나 이룬 이 풍경은 보는 이에게는 오로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돌 하나(혹은 몇 개의 돌)만을 보여준다. 온통 흰색으로 가득한 화면에 놓인 돌, 그리고 그 돌을 양분하고 있는 수면, 돌의 그림자만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물과 바탕의 가늠은 잘 구분되지 않는다. 화면은 인화지의 표면, 피부이자 물과 공기의 영역이고 마치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영역이다. 그것은 비어있으면서도(상상이 가능한 여백) 실은 돌에 개입되는 현상이 되고 실제 돌에 흔적을 남기고 그 돌을 투영하게 해주는 물리적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사진은 그런 것들을 순간 눈이 멀게 만들고 주변 풍경을 모조리 증발시켜버린다. 일상적인 삶의 공간이나 특정 사물과의 연계성이 죄다 지워지거나 망실된 상태에서 오로지 돌만이(조심스레 들여다봐야 물에 잠긴 돌임을 알 수 있다)놓여있는 이 풍경은 실재 하는 풍경이면서도 실은 낯설고 이상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그 이상하다는 느낌은 돌을 제외한 모든 배경이 온통 백색으로 물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 흰색은 실은 인화지의 색상이자 물의 색채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진이미지가 가능한 지지대(인화지)와 돌이 잠긴 물이 구분 없이 혼재해있는 상황성으로 인해 초래된, 미니멀하고 초절제된 구성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다. 미약하지만 색채가 있는 지점은 돌의 표면이다. 흑백사진으로 보이지만 실은 컬러사진이다. 컬러사진으로 이루어진 단순성이 상당히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오로지 수면 위와 물 아래 잠긴 돌의 표면만이 색채를 머금고 있고 미세한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은폐되고 가려진 화면에 겨우 보이는 부분이 조심스레 이제 곧 사라질 것만 같은 최후의 색채를 내뿜고 있다. 슬그머니 촉각적인 부분을, 관능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박찬우는 오랫동안 광고사진, 상업사진을 찍어왔다고 한다. 현란하고 감각적인 디자인과 인공의 기술을 마음껏 담아오던 그의 눈에 어느 날 문득 돌 하나가 다가왔다. 강가나 바닷가에서 만난 돌이다. 그 돌들은 한결같이 물에 잠겨있거나 물을 머금고 있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 돌은 인공의 손길에 의해 조탁되거나 가공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자 저절로 생겨난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저 돌 하나가 저러한 형상과 색채를 지니게 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물살과 바람, 계절의 변화에 힙 입어 생겨난 흔적이다. 그러니 한 개 돌의 표면에는 인간이 눈으로 실측하거나 가늠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힘, 신비한 변화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돌을 통해 비로소 그 기운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인간이 꾸민 모든 감각과 디자인, 예술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더없이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을 만난 것이다. 하여 그는 그 돌을 정면으로 촬영했다. 마치 증명사진을 찍듯이 돌 자체를 응시해 응고시켰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일한 사진가답게 무척 감각적으로 조율되고 세련되게 뽑아낸 사진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그 안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돌을 각인하고자 했다. 그 모순(?)된 것이 공존하는 사진이다.

“2008년 봄날 경북 봉화의 어느 강가에서 처음 돌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돌들을 봤지만, 무심코 돌을 하나 집어 찬찬히 들여다 본 순간, 20여년 동안 magazine이나 commercial촬영을 하면서 보았던 수많은 가구, objet, 건축 등의 디자인보다 수 십, 수 백년 동안 자연이 만든 깊이감은 훨씬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제목은 ‘stone돌’입니다. 제 사진을 본 사람들도 ‘돌’로 봅니다. 그렇지만 ‘water물’이 주인공 일 수도 있습니다. 돌은 물을 만나야 제 색깔을 내죠. 돌의 모양을 수많은 세월 동안 디자인 한 놈도 물이구요. 그래서 모든 사진적 테크닉이나 구도, 디자인적 요소를 최소화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려고 합니다. 강에서 온 놈은 강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온 놈은 바다의 모습으로..돌과 물의 증명사진입니다.” (작가노트)

화산 폭발의 용암이 식어 바위산을 이루고 몇 십억 년 동안 흙이 쌓여서 변성암이 되고 수 억 년의 세월 동안 바위가 물에 씻겨 수성암이 되어 돌이 탄생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돌 하나가 그렇게 무수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돌, 늙은 돌이자 영원한 돌이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돌에서 장수를, 불변을, 침묵과 배신하지 않음을 보았다. 지조와 절개, 군신의 예를 헤아렸다. 너무 얇고 가벼운 입술과 부박스러운 마음을 대신해 저 돌과 같은 강건함과 결연함을 안으로 지니고 싶어 했다. 당연히 돌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상징이 되었다. 그것이 동양의 돌과 관련된 문화, 텍스트를 이룬다. 그래서 돌은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존재가 된다. 군자의 덕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멸과 불변, 침묵과 고요, 깊음과 차가운 성찰을 상징한다. 아울러 돌은 자연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결정적 얼굴이다. 아득한 시간, 세월이 최후로 남긴 얼굴이기도 하다. 부동과 정적 속에 단호한 물성으로 굳은 그 돌은 영원성을 보여주며 모든 수식과 허세를 누르고 더없이 졸하고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형상, 몸을 안긴다.

박찬우는 자연의 순리에 기꺼이 응해서 남겨진 마지막 조각이자 물살에 문드러지고 닳아진 살들로 이루어진 돌을 찾았고 그 무심하기 그지없는 상을 사진에 담았다. 당연히 물에 돌을 담고 찍었다. 돌의 형상은 물로 인해서이고 돌은 물을 만나야 아름답다. 돌과 물은 한 쌍이 되었다. 물에 잠긴 돌과 물 밖으로 나온 돌이 데칼코마니처럼 놓여있다. 돌이 지어내는 선과 물에 의해 드리워진 돌 그림자의 선이 절묘하게 일치한다. 지극히 얇은 수면을 경계로 돌은 슬그머니 절개되어 있는 듯하다. 물을 지긋히 누르고 앉아있는 돌의 무게와 부피가 묘하게 보는 이의 감각을 건드린다. 물의 부력과 돌에 깃드는 중력, 투명한 공간과 공기의 저항을 받는 외부가 공존한다. 그 사이에 놓인 돌의 생애가 인간의 삶을 은연중 오버랩 시킨다. 시간과 세월에 의해 조탁된, 피치 못할 얼굴 하나를 들고 현실과 이상 속에서 부침을 겪는 내 누추한 육신말이다. 그러나 박찬우가 찍은 돌 사진은 사실 그러한 감상보다는 절제된 조형감각과 눈부신 색채, 최소한의 이미지와 색채를 겨우 보여주는 구성 속에서 좀 더 빛을 낸다.